고난주간 묵상 시리즈 ➎
침묵 속에 머무시는 하나님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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사랑하는 진원 여러분! 오늘은 ‘Good Friday’라 불리는 금요일입니다. 거의 대부분의 그리스도교* 성도들이 금식과 예배로 오늘을 기념합니다. 매일이 주의 날이지만, 오늘 하루 조금 더 의미를 부여하여 복음의 핵심이 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
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.
*그리스도교: 가톨릭, 동방 정교회, 성공회, 감리교, 오리엔트 정교회, 회중교회, 장로교 등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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십자가의 사건은 가장 깊은 어둠의 순간이었다. 이 어둠은 단지 햇빛이 사라진 물리적 상태를 넘어서, 하나님의 침묵과 부재로 여겨지는 절망의 상징이다. 그러나 예수의 고난과 죽음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다. 그 안에는 인간의 고통과 절망, 죄와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시는 하나님의 신비한 임재가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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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가시관을 쓴 그리스도, Dirck van Baburen, 1623년 |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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시몬 베유 (Simone Veil: 프랑스 정치인)는 창조주 하나님과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 사이에 끝없이 깊은 간극이 있다고 말했지만, 우리는 그 간극 속에서도 하나님이 머무시며 고통을 함께 감당하신다는 신앙을 붙든다. 하나님의 침묵은 부재가 아니라, 인간의 가장 깊은 고통까지 동행하시는 방식이며 그분의 깊은 연대다.
마치 절망에 빠진 이 곁에 말없이 함께 앉아주는 친구처럼, 하나님은 고통의 현장에서 많은 말을 하지 않으신다. 주님은 겟세마네에서 땀방울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시며, 십자가 위에서는 "나의 하나님,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"라고 외치셨지만, 성부 하나님은 침묵하셨다. 그러나 그 침묵은 방관이 아니라 참여다. 외면이 아니라 품음이다. 하나님은 말없이 함께 계심으로, 인간의 고통에 가장 깊이 연대하신다. 어둠 속에 계신 하나님, 침묵 가운데 동행하시는 주님을 우리는 그 십자가에서 본다. 이 어둠은 도피할 대상이 아니라 통과해야 할 신앙의 공간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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신앙은 늘 밝고 환한 길을 걷는 것이 아니다. 진정한 신앙은 오히려 어두운 밤을 통과하며 더 깊어지고 단단해진다. 16세기 십자가의 요한 (St. John of the Cross)은 이 여정을 "영혼의 어두운 밤"이라 불렀다. 그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은 감추어진 채, 그러나 더욱 깊이 우리를 다듬으신다.
오늘날 한국 교회와 성도들에게 이 어두움의 신학은 큰 도전이다. 우리는 자주 신앙을 성공, 번영, 밝은 미래와 연결 짓지만, 진짜 신앙은 이해할 수 없는 절망과 침묵, 상실의 시간을 지나며 그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난다. 어두움은 우리의 믿음을 단련하는 하나님의 방식이다. 우리는 이 어두움의 여정을 두려움 없이 통과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. 고통과 상실, 실패와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. 그 부르심은 때로 외로움의 언어 즉, 침묵으로 들려온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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십자가는 단지 고통의 끝이 아니다. 그것은 화해의 시작이며 부활의 문이다.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이 주어졌다고 선언한다.
고린도후서 5:18 “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”
십자가는 하나님의 긍휼이 가장 어리석은 방식으로 드러난 사건이다. 그것은 절망의 자리에서 피어난 생명의 시작이었다.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에서 멈추지 말고 부활로 나아가야 한다. 그리스도인은 절망을 말하되, 그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붙드는 사람이다. 예수의 십자가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듯, 우리 삶의 모든 어둠도 하나님의 손안에서 부활로 이어질 수 있다. 십자가는 죽음의 상징이지만, 동시에 생명의 문이다. 어둠과 절망을 뚫고 기다리는 자에게,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신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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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어두운 자리에까지 이른 증거다. 우리는 그 어둠을 피하지 않고, 그분의 침묵 안에 머물며, 끝내 부활의 빛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.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시며, 우리는 그분의 연대를 기억하는 공동체다. 그러니 오늘도, 우리는 이 어둠을 통과하여 빛을 향해 걷는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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